본문 바로가기

NEWS/Letter

[mplanners 엠플래너스]간판 보는 미식가

 

이제 여름도 지나가고 말도 살찐다는 가을이 왔습니다. 특히 무더웠던 올해 여름,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여름 휴가는 즐겁게 보내셨는지요? 요즘은 휴가를 가더라도 그 지역의 맛집을 많이 찾아가는데요. 여행의 재미 중 하나가 바로 그 지역의 맛집을 찾아가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보통 네**, 구*, 다* 검색을 많이 해서 가는데, 이렇게 블로그나 포털, TV에 쏟아지는 맛집 홍수에도 불구하고 소개된 집들은 지역 어딜 가나 사람들로 넘쳐나기도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이렇게 넘쳐나는 맛집들 속에서 진정한 맛집으로서의 포스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간판으로 구별하는 맛집 찾기'라는 주제로 좀 가볍게 다가가 보려 합니다. 음식점의 간판은 그 집을 다른 집과 구별하게 알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식이자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이덴티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간판을 보는 현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래 사례로 소개하겠지만 직접 간판만 보고 찾아낸 몇몇 맛집들이 있답니다. 얼마 전 모 프로그램에서 성시경도 이런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그 집만의 개성과 맛으로 '맛집'이라 평가받을 만한 음식점들의 이름표-간판들의 특징을 살펴볼까 합니다.
* 잠깐, 여기서 말씀드릴 음식점은 프랜차이즈나 전통이 없는 집, 특히 최근 쉐프 열풍으로 생겨난 홍대나 이태원의 음식점은 제외하였습니다. 또한, 극히 주관적인 맛 평가임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간판'에 대한 이야기일 뿐, 해당 식당 자체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브랜딩: Simple! Simple! Simple!

간판만 보아서는 무엇을 파는 집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보시는 간판들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름과 아이덴티티 그리고 여백 외에는 정보가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간판은 '정보'가 아니라 '표식'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 제 기능이라 할 수 있는데, 아무 군더더기 없이 제 역할에 충실한 간판들입니다. 그만큼 그 이름에 자신이 있는 음식을 한다는 '표식'이 아닐까 합니다. 위의 사례에서는 없지만, 그래서 맛집 간판들 중에는 흰색 바탕에 검정 폰트로 단순 명료하게 명시성을 높이면서 그 포스를 나타내는 집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백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백이 없는 간판은 왠지 음식에 대한 자신 없음을 감추기 위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간판에 내세우고 있는 듯합니다.

반대로 아래의 간판들은 무엇을 하는 집인지를 그 이름과 디자인을 통해 확실히 브랜딩한 간판입니다. 국수라는 메뉴의 대명사인 집인 것처럼, 누가 봐도 그리스 음식점인 것을 자신 있게 내세웠습니다. 성북동 국시집은 간판과 음식 맛이 가장 어울리는 집인 것 같습니다. 정갈하면서도 멋스럽게 간판을 아주 작게 만들었고, 간판만 봐도 '그 집, 국수 하나는 맛있겠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기타 과거 고위직 사람들이 많이 갔다고 하는데요. 안동 지방 음식이어서 그런지 문어 같은 다른 메뉴도 매우 훌륭하다고 합니다.

토니스그릭은 '누가 봐도 그리스'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간판과 컬러로 브랜딩을 했습니다. 테이블도 지중해와 산토리니 생각이 나는 시원한 푸른색입니다. 정통 그리스 음식이 먹고 싶다면 이 집을 찾아가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실제로 산토리니와 아테네 현지에서 섭외한 셰프들이 그리스 정통 음식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추가로 오른쪽은 홍대에 있는 국시집입니다. 왠지 간판이 폰트와 함께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아마도 잘 모르지만, 성북동 국시집 카피 버전인 거 같습니다.

 
잘 되는 집 간판의 폰트

폰트는 브랜딩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떤 폰트인지에 따라서 느낌이 너무 크게 변합니다. 그럼 잘되는 집 간판의 폰트는 무엇을 많이 쓸까요? 아래에 보시는 간판들처럼 보통 궁서체나 흘려 쓴 폰트, 그리고 정직한 고딕형 같은 오래된 느낌의 폰트를 쓰는 집들도 맛집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 음식에 있어 정통성을 가지고 지내온 자신감과 고집이 이 맛집들의 힘 있는 폰트에서 느껴집니다. 이 집들이 세련되고 모던한 폰트로 간판을 달고 있다는 것은…상상이 잘 안 됩니다.

이문 설렁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입니다. 1904년에 개업을 했으니 정확하게 111년이 되었네요. 물론 저는 100년 조금 넘었을 때 갔다 왔습니다. 궁서체 형식의 약간의 흘림체가 전통을 느껴지게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파란색이나 빨간색 글자간판을 좋아하지 않는데 묘하게 정감이 갑니다. 아마도 폰트의 힘인 것 같습니다.


광화문집은 30년 전통의 김치찌개 전문점입니다. 김치찌개 하나로 30년 인기를 누려온 것처럼 고딕 폰트가 왠지 고집스러워 보입니다.

평양식 냉면을 가장 가깝게 서울에서 맛볼 수 있다는 을지면옥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간판이 왜 맛집 느낌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통과 오랜 자신감이 묻어납니다. 이 집은 감칠맛보다는 약간 심심한 평양식 냉면이 일품이고 특히 편육이라고 하는 삶은 돼지고기가 최고 메뉴입니다.

아래의 두 식당은 그 지역에 갈 때마다 찾았던 맛집입니다. 제주 바우식당은 얼마 전 서울에 체인이 생겼는데, 처음 간판 그대로의 폰트를 따라 쓰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신사동에 새로 오픈했다고 하는데, 아직 그 맛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바우식당의 제주 토속의 맛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간판에 보입니다.

봉포 머구리집은 각종 해산물을 넣은 물회가 유명한 속초의 맛집입니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터를 옮겨 확장하면서, 그 이름의 폰트만은 새집에 그대로 가져온 또 다른 예입니다.

 
전통이 맛이 느껴지는 낡음, 간판의 노련함

오래된 맛집의 가장 큰 특징은 좀 낡아서 소탈한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주인장의 게으름이 보이는 지저분함이 아니라 간판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은 이 집 음식에 대한 신뢰와 노련함이 느껴지는 낡음입니다. 용케도 이런 것은 한눈에 잘 구별이 됩니다.

제주도 표선의 춘자 멸치 국수는 간판이랄 게 없고 흔히 얘기하는 시트지가 붙어져 있습니다. 찾기는 쉬운데 '이게 맛집 맞아?' 할 정도로 노후해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맛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먹은 멸치 국수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면을 사용하고 착한 가격에 정말 오래 우린 멸치육수가 최고입니다.

개인적으로 노란색 바탕의 간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십중팔구 그저 그런 집일 확률이 높으니 노란색 간판집은 제외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하지만 예외도 있을 수 있는데요. 반포치킨은 옛날 방식 치킨의 대명사입니다. 35년 한 자리를 고수하고 마늘 치킨을 최초로 출시한 곳입니다. 낡았다기보다는 요즘처럼 프랜차이즈 치킨집이 많은 세상에서 그 집만의 옛날 맛을 고수하는 전통이 느껴집니다.

 
아무 정보없이 맛집찾기 실습

지금까지 말씀드린 맛집 찾기 노하우를 가지고 제가 찾은 맛집들을 몇 개 소개해 드립니다.

먼저 도가니탕 집입니다. 서울성곽길을 돌고 삼청동길로 내려오다 보면 허름한 가게가 눈에 들어옵니다. 뭔지 모를 폰트, 도가니탕이라는 메뉴, 전통이 느껴지는 낡음 등 삼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집니다. 한 2번 정도 지켜보다가 3번째에 들어가서 맛을 보았습니다. 좁고 테이블도 몇 개 안 되는데 아주 맛이 담백합니다. 작년인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타블로편에 나오는 바람에 이제는 모든 사람이 아는 맛집이 되어 이 집 도가니탕 맛을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집도 삼청동 쪽에 위치해 있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얼마 전 TV에 소개되는 것을 보고 맛집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바깥에 있는 화분에는 실제 메밀을 키우고 있구요. 흰 바탕에 명확하게 음식점 이름이 보입니다.

다음은 제주도 고기국수 집입니다. 고기국수를 워낙 좋아해서 올레국수, 자매국수 등 많이 먹어보았지만, 단연코 이 집이 제일 담백하고 맛있습니다. 아직 유명 맛집까지는 안되어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도 좋구요. 올레 6번 길을 걷다가 발견한 집입니다. 이중섭 거리 근처이구요. 간판이 크지 않고 심지어 한쪽에 붙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데 보는 순간 맛집 느낌이 납니다. 살짝 비뚤어진 폰트와 전통이 느껴집니다. 이 집은 주문하면 그때 면을 뽑습니다. 충분히 숙성된 반죽을 즉시 뽑아서 생면을 쓴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곳은 서북면옥입니다. 올림픽대로 북단에서 조금 올라오다 보면 보입니다. 정말 허름해 보이고 요즘에는 거의 없는 네온간판입니다. 그런데 왠지 전통이 느껴집니다. 이 집도 몇 번을 지나다니다 담백한 맛에 반했습니다. 알고 보니 소문난 맛집이었고 주말에는 아주 길게 줄을 서는 곳이었습니다. 평양식 냉면도 훌륭하지만, 편육과 만두도 맛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아마 동의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맛집 간판에서는 핵심에 대한 자신감과 그로 인해 버텨 오면서 쌓여온 전통, 그 명료함의 느낌이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첫눈에 어떤 이미지를 주고, 사람들에게 판단의 최초 근거가 되는 간판 - 사실 우리가 하는 일과 많이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가볍게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오늘부터 퇴근길에 음식점 간판들을 보시면서 맛집인지 아닌지 판단하시고, 맛있게 테스트도 해보시면서 간판 보는 미식가가 되어보세요~